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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회의 결과 (19.07 이전)

연구원소식

일본 경제 재정의 평가와 전망: 한국과의 비교 관점/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유시후미 연구

  • 작성일2018/07/17
  • 분류일본
  • 조회수12,199

I. 개 요

 

1. 일시 : 2018. 6. 29. (12:00~15:00)   

2. 장소 : 호텔토마스(명동)

3. 발표자 : 국중호(요코하마시립대, 교수)

                      김명수(계명대학교, 교수)  

4. 참석자  

    원내 (5) : 정성춘 (KIEP, 선임연구위원)
김규판(KIEP, 연구위원)
이형근(KIEP, 선임연구원)
이정은(KIEP, 연구원)
김승현(KIEP, 연구원)

 

   원외 (11) : 구본관(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김영근(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오태헌(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
이홍배(동의대학교, 교수)
정훈(인천대학교, 교수)
현석원(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이지평(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이철희(CJ미래경영연구원, 부장)
이승렬(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안시온(한국은행 조사국, 과장)
원종학(조세연구원, 초청연구위원)

 

일본연구회 위촉외부전문가 총 13명 중 11명 참석, 참석률 85%   

 

4. 제 목  

   - 일본 경제 재정의 평가와 전망: 한국과의 비교 관점(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 연구(김명수, 계명대학교)

 

 

II. 주요 논의 사항

 

1. 발제내용 *상세내용은 첨부된 발표자료 참고

 

1) 일본 경제 재정의 평가와 전망: 한국과의 비교 관점

 

일본의 시기별 경제성장률

 

- 일본경제는 1956~73년 평균 실질GDP 성장률 9.1%를 기록하는 고도 성장기를 보였으며, 이후 1973~80년 후반 거품경제 시기까지 평균 성장률 4.2%의 안정 성장기를 보임.

 

- 거품경제 붕괴 이후 1990년대~2000년대 경제성장률이 매우 저조한(평균 1%) ‘잃어버린 20을 겪음.

 

- 201212월말 제2차 아베 내각이 들어선 이후 일본의 명목·실질 GDP가 둘 다 상승

여기에는 2016년 말 아베정권이 GDP 산출방식을 개정한데서 비롯한 증가분도 포함

* 일본은 20164/4분기부터 그전까지 경비로 취급하던 연구개발비 및 특허사용료를 투자로 간주하여 GDP에 가산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 GDP20조 엔 정도 증가함.

 

경제지표의 한일 비교

 

- 일본의 가계저축률은 199510.6%에서 20162.7%로 하락함. 같은 기간 한국의 가계저축률은 18.3%에서 8.8%로 하락하였음.

 

- 1인당 GDP(달러표시)의 경우, 일본 대 한국의 비율이 2000년의 3.2배에서 2012년에는 2.0배로, 2016년에는 1.4배로 줄어들어, 한일 간 격차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음.

 

- 가계소득(달러표시)의 경우, 한일 간 소득격차가 20002.8배에서 20161.3배로 크게 줄어들었음.

아베노믹스 시행 이후 엔화 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하여 그 영향으로 일본의 달러 표시 1인당 GDP 1개월 당 가계소득(가구당)이 감소

가계소득의 경우, 달러 표시 수치는 아베노믹스 시행 이후 1만 달러 이상 하락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엔화로 보면 201257833엔에서 2016587,500엔으로 16,667엔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남.

 

- 소득불평등의 경우, 한국의 가계소득 변이계수가 일본보다 높고, 그 수치가 일본보다 심한 변동폭을 보이고 있어 한국의 소득불평등도(소득집중도)가 일본에 비해 아직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일본 예산구성 및 세출 추이

 

- 일본의 예산구성을 살펴보면(2017년도 기준), 1/3(33.3%)이 사회보장비(연금, 의료비 등), 1/4(24.1%)가 국채비(국채상환비용 및 이자비용)로 고정되어 있어, 경직성이 높음을 알 수 있음.

2017년도 예산안의 경우, 6.1%가 공공사업, 5.5%가 교육정책 등 문교 및 과학진흥비에 대한 예산으로 책정되어 있는 상황

 

- 1965~2015년까지 일본의 세출의 구성비 추이를 살펴보면, 사회보관계비 및 국채비가 각각 14.7%32.0%, 0.3%22.9%로 급증한 반면, 문교 및 과학진흥비와 공공사업관계비는 각각 13.3%5.7%, 21.0%6.5%로 하락한 것을 알 수 있음.

같은 기간 동안 세출총액은 매년 꾸준히 증가하여 3.7조 엔98.2엔으로 증가했으며, 세출의 GDP대비 비율도 11.0%19.6%로 증가하였음.

 

 

한일 재정 비교 및 평가

 

- GDP 대비 국가채무 비중은 한국이 일본에 비해 현저히 낮음.

 

- 1965~2014년 사이 국가채무(장기채무)GDP 대비 비율 추이를 살펴보면, 일본은 7.1%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14205.4%기록하고 있으며, 한국은 18.3%에서 201435.1%로 증가함.

 

- 그러나 가계 순자산, 대외 불안정성, 국민성 등의 요인에 의해 한국이 일본보다 적자 재정에 더 취약할 수 있음.

일본의 가계 순자산(자산-부채)은 한국의 약 3.4배로, 일본 인구가 한국의 약 2.5배라는 점을 고려해도 일본이 현저히 높은 수준이며, 이는 한국 가계의 국채발행 증대에 대한 소화 능력이 일본에 비해 월등히 부족함을 의미함.

한국은 대외 불안정성이 일본에 비해 높은 편임. 외국인의 일본 국채 보유 비율은 11.0%에 불과하여 대외 불안정성이 낮다고 볼 수 있음.

일본인은 내부(국내)에 머물려는 정주성(定住性)이 한국인보다 높아, 재정 파탄 시 일본으로 유입된 부()의 국외 유출이 적을 수 있음.

아베노믹스 하에선 일본은행이 40%를 넘는 국채를 떠안고 있는 상황으로, 일본은 국가부채가 많다기 보다는 가계 및 일본은행이 채권자이고 정부가 채무자인 형태의 정부부채가 많은 셈

 

2)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 연구

 

근대화의 과정이며,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 과정이었던 대한제국기의 일본인 기술자였던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사례를 사진첩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대한제국기의 기술 도입 과정에 나타난 일본인 기술자들의 정치적 역할을 알아볼 수 있음.

 

-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의 역할: 철도수도전신은행 등 인프라 부설, 자본주의 제도장치시스템의 도입, 서양기술일본 경유 서양기술일본기술의 도입, 기술도입의 정치적 성격, 제국주의 국가의 사정에 따른 기술의 취사선택

 

이노우에 요시후미: 한국으로 건너오기 전

 

- 1868년 교토 출생, 교토중학교를 거쳐 교토부화학교에 입학한 이후 동종화과(일본 사생화나 야마토에를 공부하는 분야)를 졸업

 

- 식산흥업(殖産興業,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킴)적 의미가 강한 미술교육의 분위기 속에서 공부했으며, 졸업 후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공예품 제작에 참여함.

 

- 1893년 이미 철도차량제조업을 시작하고 있었던 이노우에는 1895교토전기철도회사(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전기철도)의 차량을 청부받아 제작하였고, 이후 전기철도 및 일반철도의 차량을 다수 제작하였음.

 

대한제국 기술자로서의 활동

 

(한성전기회사 전기철도 차량 제작) 

- 대한제국기에 전기철도는 한성전기회사(18981월 설립)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1898915일 경희궁 앞에서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 189954일 시승식과 개통식이 거행됨(서대문-동대문).

 

- 이노우에는 189946일 한국에 들어와 19001월 제1차 전기철도 차량(전차), 19016월 제2차 저차 차량을 납품하였음.

 

(평식원 도량형제조검정소 기사 

- 개항 이후 조선은 외국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도량형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으며, 몇 차례 도량형 통일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현실적으로 효과를 보지 못했음.

 

- 대한제국기인 19027월 궁내부 산하에 평식원이 설치되면서 도량형의 개혁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

 

- 가사이 아이지로(笠井愛次郎)1901한국도량형법제정안설명기초·제안했고, 이노우에가 건의한 도량형 개정이 받아들여져 190210월 한국도량형법개정안이 발포되었음(가사이·이노우에의 공동 의견서 제출).

 

- 평식원 기사에 임명된 이노우에는 도량형제조검정소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1906년 해임될 때까지 도량형기의 제작과 검정을 관장하며 실질적인 도량형법 개정을 주도하였음.

 

(용산 군기창 건설과 러일전쟁 종군)

- 1905320일 군기창 건설 완료: 생산능력은 1일에 30년식 소총 10정과 실탄 3천 발/ 투입된 비용은 총 20만원

 

- 공사가 끝난 뒤에는 종군할 것을 요구받아 평양에서 제1군 사령부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러일전쟁에 참가한 일본군의 임시병영 건설에 협력함.

 

- 평식원 기사에서 해임된 이노우에는 1908년 영국으로 건너가 유럽을 시찰한 후 다시 서울로 돌아옴.

 

(러일전쟁 이후 유럽 시찰과 일영박람회)

- 1910년 초 이노우에는 일영박람회 장식을 의뢰받고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듬해인 1911년 귀국

 

- 일영박람회는 3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1910514~10 29일까지 개최됨.

 

- 일영박람회를 통해 일본은 1) 자국의 근대산업을 동맹국이면서 세계경제대국인 영국에 널리 소개하여 통상을 활성화하고 2)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의 승리와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식민지 경영의 성과와 그로 인한 자원을 과시하고자 하였음.

 

일제강점기 기업 활동

 

- 한국 정부에 초빙된 기술자였던 이노우에는 러일전쟁 이후 본격적인 기업가로 변신

 

- 이노우에는 평식원 기사에서 해임된 뒤에도 한국에 남아, 한국에서 기술자로서 쌓은 경험과 사업적 전망,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기업가로 변신

 

- 이노우에는 일제강점기에 만주 석탄 채굴을 목적으로 한 광산업, 과수원 경영, 제약유통업, 유지공업, 토지경영 등을 진행했음.

 

- 194011월 조선을 떠날 때까지 최초 기술자로 한국에 건너온 이노우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기업 활동을 했으나, 크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음.

 

2. 토론 내용

 

1) 일본 경제 재정의 평가와 전망: 한국과의 비교 관점

 

일본에 재정 위기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일본이 가지고 있는 가계금융자산이 국가채무를 훨씬 상회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생각. 일본의 상태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국가채무가 아닌 정부채무(민간이 채권자)의 상태임. 외국인이 보유한 국채비율은 11%밖에 되지 않기에, 채무는 대외적인 문제가 아닌 대내적인 문제라 할 수 있음. 일본이 그리스보다도 채무비율이 훨씬 높음에도(2) 재정이 파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

 

- 민간 금융자산이 정부부채보다 적어지면 채권자들이 그만큼 해외로 나간다는 의미이며, 이 경우 국채이자비용이 급증하여 재정 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

 

발표자는 아베노믹스의 정책에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음. 그러나 주류경제학(케인즈 경제학)에서는 경기가 불안정(경기불황) 할 때는 통화정책이 도움을 줄 수 있고, 일본은 이것이 잘 작동한 경우라고 생각함.

 

- 2012년 엔 환율이 70~80엔이었을 때, 달러기준 GDP 규모는 컸으나 경제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았고, 그와 비교하여 지금은 상대적으로 달러기준 GDP는 낮아졌으나, 엔화기준 GDP(물론 R&D 등을 집계에 추가한 영향도 있겠지만) 증가했고, 그것이 고용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평가받는데, 과연 부정적으로만 볼 수 있을까?

 

일본 고용문제가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데, 간과하면 안 될 점은 비정규직이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임. 또한 임금(엔화 기준)이 조금 늘어나고는 있으나, 이는 일자리 부족 등에 의해 기인하여 상승하고 있는 것임.

 

- 아베노믹스 금융완화 정책의 속내는 사실 재정문제라고 보는데, 아베정권 이후 4년 반 동안 일본은행의 보유국채가 311조 엔 증가하여 일본은행의 국채 보유비율이 40% 정도에 달하고 있음. , 아베 정권에 들어서서 일본은행이 국채를 지탱하는 기관으로 바뀌었다는 것인데, 일본은행이 이처럼 방대한 국가채무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는 금리가 1%만 상승해도 이자비용은 엄청나게 불어나 심각한 재정압박 요인으로 다가오게 됨. 따라서 일본의 금융완화 정책은 일본은행에 의한 간접적인 국채인수를 통해 재원을 조달하고 국채 이자율을 낮게 유지하여 이자비용을 낮추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음. , 금융완화는 이와 같은 재정문제 대응에 그 속내가 있었다고 생각함.

 

- 도요타와 같이 임금이 꾸준히 올라가고 있는 케이스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임금 상승의 계기도 한국과는 달리 정노사위원회(정부가 포함)의 교섭을 통하여, , 정부가 임금상승을 요구하여 올라간 측면이 없지 않아 있음.

 

- 아베노믹스로 고용창출을 확대하는 프레임워크가 도입되고, 주식가치도 상승하는 등 아베노믹스의 긍정적인 효과를 아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면에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음.

 

2)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 연구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때까지 도량 단위 통일이 이뤄지지 못하여 많은 불편을 겪었는데, 이노우에는 도량(度量)형 기준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임.

 

- 일례로 조선시대에는 면적단위를 생산량=면적으로 정하여, ‘1이라고 하는 면적은 쌀 1(24.45리터)을 생산할 수 있는 경지 면적을 뜻했음. 따라서 비옥한 땅은 상대적으로 ‘1의 면적이 작았고, 척박한 땅은 더 넓은 등 차이가 존재했음.

 

도량형 통일 작업도 결국은 토지조사 등 일본의 사업에 사용되었는데, 이것도 일제에 의한 일종의 착취의 개념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1901년 이후 누가 어떤 목적에서 도량형이 필요한지 제시했는가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가?

 

- 20세기 전후부터 대한제국 정부는 도량 단위 통일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 그런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때 마침 일본에서 통일을 추진하자는 제안을 해 온 것이나, 도량형 통일의 주체는 대한제국 정부였음.

 

일제 강점기 국내에서 활동한 일본인, 한국인 기업가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 일제시대 경제에서 제조업 회사 등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 비율을 보면 70% 정도가 일본 사람, 나머지 30% 정도가 한국 사람이었으며, 거의 다 친일로 규정되는 사람들임. 이들에 대한 평가를 단지 친일파로 평가하는 것에서 끝내고, 그들에 대한 연구는 허용조차 되지 않는다면, 그 이상의 사실을 알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함. 친일 행각을 한 이들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고, 이견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나, 이들이 당시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등을 설명하기 위한 차원에서의 연구 자체는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함.

 

이노우에의 일생을 보면, 일영박람회 등과 같은 사건은 과학기술을 도입하려는 시도였고, 기업가로 변신한 것은 산업화·산업기술·상품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정책과 비즈니스 중 어느 쪽에 더 중심을 두었다고 보는가?

 

- 1905~1910 사이에 이노우에의 역할이 바뀐 것으로 보고 있음. 1908년을 분기점으로 보는데, 그 이전은 상황적으로 정책적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던 것이 그 이후부터 기업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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