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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싱가포르 CPF 제도가 한국 연금개혁에 주는 시사점

싱가포르 Kim Seonghoon Singapore Management University, School of Economics Associate Professor 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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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CPF 제도가 한국 연금개혁에 주는 시사점

'연금형 복권'이 된 한국 국민연금

한국 국민연금은 급속한 인구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3년 기준 0.72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며, 2024년에도 약간 상승한 0.75명에 불과하다. 이는 OECD 평균(1.51명)의 절반 수준이며, 장기적으로는 인구 재생산 자체가 어려운 수준이다.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은 2024년 12월 기준 20%를 넘겨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출산은 줄고 기대수명은 늘면서 연금 수급자는 늘고 납부자는 줄어드는 악순환이 펼쳐지고 있다. 문제는 이 악순환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민연금 제도는 1988년 도입된 이후 줄곧 부과 방식(pay-as-you-go)을 유지해왔다. 이 방식은 현재의 노동자들이 낸 보험료로 현재의 은퇴자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구조이다. 젊을 때 노인을 부양하고, 나이 들면 후배 세대가 나를 부양해준다는 선순환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구조는 인구가 증가하거나 정체될 때만 작동한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이 선순환이 파열음을 내고 있다. 국민연금 재정추계에 따르면 기금은 2056년경 소진될 것으로 예측되며, 연금 수급자는 납부자 수를 2055년부터 초과할 예정이다. 여야가 18년에 만에 더 내고 덜 받는 연금개혁에 합의했지만 이는 기금 고갈 시점을 불과 8년 늦출 뿐이다. 공적 신뢰의 붕괴는 숫자보다도 무섭다. 젊은 세대는 국민연금을 '내는 건 확실한데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제도'로 인식하고 있다. 말하자면 '연금형 복권'인 셈이다.

싱가포르 CPF: 연금 너머의 생애 자산 플랫폼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싱가포르의 중앙적립기금(Central Provident Fund, CPF)은 흥미로운 대안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CPF는 1955년 영국 식민정부에 의해 강제 저축 제도로 도입되었으나, 현재는 주택, 의료, 교육, 노후 소득 보장 기능까지 아우르는 종합 복지 플랫폼으로 발전했다. 제도의 핵심은 개인 적립 계좌 중심의 구조와 ‘자기 책임’이라는 원칙이다. 55세 미만 싱가포르 근로자는 소득의 20%, 고용주는 17%를 납부하며, 이 금액은 개인의 CPF 계좌에 매달 적립된다. 이는 단순한 연금이 아니라, 생애 전반의 재무 설계를 가능하게 하는 국가 운영 통장이라 할 수 있다.

CPF는 세 개의 계좌로 구성된다. 일반계정(Ordinary Account)은 주택 구입, 자녀 교육, 투자 등에 사용되며, 특별계정(Special Account)은 은퇴를 대비한 저위험 자산에 자동 투자된다. 의료계정(Medisave Account)은 병원비와 건강보험 지출에 사용된다. 제도는 단순하지만, 목적별 계좌 분리가 자산 운용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인다. 싱가포르 국민은 자신의 CPF 계좌 잔고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고, 무엇에 얼마가 쓰이는지를 명확히 안다. 또한 본인 사망시 CPF계좌에 잔고가 남아 있다면 남은 가족에게 상속이 가능하다. 반면 한국의 국민연금은 납입 내역은 확인 가능하나, 얼마를 언제 받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정치와 경제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다. 다시 말해, 싱가포르에서는 '내 돈이 내 미래를 위해 일한다'는 신뢰가 있는 반면, 한국은 '내 돈이 누구를 위해 쓰이는지도 모르겠다'는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차이는 양국 연금제도에 대한 국제적 평가에서도 드러난다. Mercer의 2024년 세계연금지수(Global Pension Index)에서 싱가포르는 78.7점(B+등급)으로 아시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같은 해 한국은 52.2점(C등급)으로 중하위권에 머물렀다.

한국 국민연금과 싱가포르 CPF제도의 근본적 차이: 국가 보장 vs 자기 책임

한국 국민연금과 싱가포르 CPF의 차이는 단순히 운영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보장에 대한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한국 국민연금은 소득재분배와 세대 간 부양을 강조하는 서구식 복지모델의 영향을 받았다. 반면 싱가포르 CPF는 동아시아적 가족 가치와 자립 정신에 기반을 둔 '강제 저축형 사회보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차이는 실제 결과로 나타난다. 싱가포르의 자가주택 보유율은 2024년 기준 90% 이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는 CPF 일반계정을 주택 구입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같은 기간 자가주택 보유율이 61%에 머물고 있다. 또한 싱가포르는 의료비 부담에서도 CPF 의료계정을 통해 개인적 준비와 사회적 안전망을 균형 있게 결합했다.

물론 싱가포르 CPF 모델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과 저소득층은 충분한 적립금을 모으기 어렵고, CPF 최저 수익률(일반계정 2.5%, 특별계정 4%)이 시장 수익률보다 낮을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CPF는 인구 구조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사회보장 모델로 평가받는다.

CPF가 한국에 주는 네 가지 시사점

CPF가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명확하다. 첫째, 정부 재정부담을 줄인다. 적립식 구조는 정부가 미래에 지급해야 할 연금 채무를 최소화하며, 이는 향후 재정 건전성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연금 지급을 위해 세금을 인상하거나 채권을 발행할 필요성이 줄어든다. 둘째, 세대 간 형평성을 제고한다. 각 세대가 자신이 낸 만큼의 노후 자산을 적립하고, 이에 기반한 복지를 누리므로 '미래 세대에 빚을 떠넘기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세대 간 갈등을 완화하고 사회 통합에 기여한다. 셋째, 출산과 가족 형성 유인을 해치지 않는다. 부과식 연금은 자녀의 필요성을 약화시켜 저출산을 유발할 수 있지만, 적립식 구조는 이러한 영향을 줄인다. 김진영 고려대 교수의 연구(2007)에 따르면, 57개국 자료 분석 결과 연금 규모가 큰 나라일수록 출산율이 낮고 이혼율이 높게 나타났다. 넷째, 자산 가치의 확실성을 제공한다. 정치적 논의에 따라 지급액이 변동되는 부과식 연금과 달리, 적립식 연금은 개인 계좌의 실적에 따라 연금이 지급되므로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국민들이 더 안정적으로 노후를 계획할 수 있게 한다.

한국형 적립식 연금제도 도입의 과제

물론 CPF 모델을 한국에 도입하는 것이 마법 같은 해법은 아니다. 가장 큰 장애물은 기존 연금 수급권자에 대한 책임이다. 현재 국민연금 기금(2025년 1월 기준 약 1,224조 원)은 이미 은퇴한 세대의 연금 지급에 상당 부분이 쓰일 예정이며, 여기에 신규 제도를 위한 적립을 병행하면 이중 부담이 발생한다. 이 문제는 단숨에 해결할 수 없으며, 점진적 전환이 불가피하다. 칠레는 1981년 국민연금을 적립식으로 전환할 때, 신규 가입자부터 강제 적용하고 기존 가입자에게는 선택권을 부여했다. 그 결과 약 90%가 새 제도로 이동했다. 한국도 유사한 방식으로의 점진적 이행이 현실적일 수 있다. 또 다른 과제는 저소득층 및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보호다. 적립식 연금은 소득이 낮거나 불안정한 근로자에게 불리할 수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가 저소득층의 CPF 계좌에 추가 지원을 하거나, 기본연금을 강화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민적 합의와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연금 개혁은 그 효과가 수십 년에 걸쳐 나타나므로, 단기적 정치 논리를 넘어선 장기적 안목과 결단이 요구된다. 기존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도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연금 제도를 넘어선 사회 철학의 전환

CPF는 단순한 연금제도가 아니라, '자기 책임에 기반한 국가적 자산 축적 시스템'이다. 이는 국가가 국민에게 단지 생계비를 나눠주는 구조가 아니라, 자산 형성과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촘촘한 플랫폼으로서 기능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눈앞의 고갈 시점을 미루는 기계적인 수치 조정이 아니라, 국민이 미래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제도에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모든 세대가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연금제도를 구축하려면, 당장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제도의 뿌리부터 개혁해야 한다. 싱가포르의 국부로 추앙받는 리콴유는 "시민들이 돈을 쓰고 싶은 대로 쓰게 두면, 나중에 국가가 그들을 부양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국가가 그것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금, 한국은 연금 위기에 대한 단기적 대처가 아닌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인구 절벽 시대에 지속가능한 복지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국가의 존속을 위한 필수과제다. 싱가포르 CPF 모델은 그 방향을 고민하는데 있어 중요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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