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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안드라 프라데시주에서 텔랑가나주의 분리로 본 인도의 주 분리

인도 정호영 자다푸르 대학 사회학 박사 과정 2013/08/20

남아시아는 영국이 점령하기 전에는 500여개의 소왕국이 흩어져 있던 지역이었다. 타자인 영국의 침입으로 대항하기 위해서 이 식민지 하의 500여개의 소왕국은 하나의 대항 자아인 ‘가상의 인도(Imaginery India) 민족주의‘를 형성해갔지만 500여개의 소왕국 시절에 뿌리를 둔 지역 간 경제적 이해와 문화로 형성된 각 지역의 민족주의는 여전히 인도 내 지역 분열의 원인이다. 마하라슈트라에서 비다바의 분리, 서 UP에서의 하릿 프라데시의 분리, 웨스트 벵골에서의 고르칸드의 분리, 비하르에서 미타란찰  프라데시의 분리, 아삼에서의 보돌랜드의 분리, UP에서의 분델칸드의 분리, 안드라 프라데시에서의 텔랑가나의 분리 등은 지속적인 요구이다. 이 글은 안드라 프라데시에서의 텔랑가나 분리의 예를 통해서 인도 내 지역 분열의 원인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2013년 7월 30일 국민회의 운영 위원회(working committee, 국민회의 최고 의결기관)는 만장일치로 안드라 프라데시에서 텔랑가나 지역을 분리해서 하나의 주로 만들 것을 결정해서 국민회의가 이끄는 중앙정부에 이를 제출했고 중앙정부는 이를 승인했다. 텔랑가나주의 수도는 현재 안드라 프라데시 주의 하이데라바드를 공통 수도로 정하여 향후 10년간 운영한 후 행정 체계 수립 후 다시 결정할 것이다.

인도의 주들은 주로 어떤 이유로 분리가 되었는가? 마드라스에서 케랄라가 분리되었던 것은 케랄라 지역의 지역언어인 말럄어가 마드라스주의 주요언어인 타밀나두어와 달랐기 때문이다. 독립 직후 마드라스주에 속해 있던 텔랑가나 지역이 안드라 프라데시에 속하게 된 것은 텔랑가나 지역언어인 텔레구가 안드라 프라데시의 언어와 같은 것도 주요 이유였다. 영화 <<차크데 인디아>>에서 인도 대표팀 하키팀 코치인 샤록 칸이 선수들의 이름과 지역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네트라 레디(Nethra Reddy)라고 한 선수가 이름을 밝히자 남인도에서 많은 성씨인 레디를 듣고 마드라스(현재의 타밀나두의 예전 명칭이나 여전히 구어에서는 지역명으로 쓰인다)에서 왔냐고 샤록 칸이 물으니 그녀는 타밀이 아니라 텔레구에서 왔다고 답한다. 힌두 사용어자인 북인도인이 샤록 칸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으니 남인도인인 레디는 그 차이는 펀잡과 비하르 정도의 차이라고 답했다. 펀잡은 펀자비가 주 언어이고 시크교를 주로 믿고 비하르는 힌디가 주 언어이고 힌두교를 주로 믿는다. 남인도에서 왔다고 해도 다 같은 남인도인이 아니라는 답변을 한 것이다. 1953년 안드라 프라데시가 마드라스에서 분리될 때도 격렬한 분리 운동 때문에 가능했는데 가장 중요한 이슈는 언어였다.


 그런데 왜 같은 텔레구를 사용하는 텔랑가나는 안드라 프라데시에서 분리를 원했는가? 언어가 인도의 주들을 나누게 된 주된 기준이었으나 텔랑가나가 안드라 프라데시에서 분리되는 것은 텔랑가나 지역의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큰 이유였다. 2010년에서 2012년 사이 텔랑가나 지역을 텔랑가나 주민들이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즉 텔랑가나 주의 분리를 요구하면서 300 명 이상이 자살을 했고 이 중 16명은 분신이었다.


 텔랑가나 지역의 면적은 안드라 프라데시의 41.47%으로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안드라 프라데시 주의 인구 40.54% 가 거주하고 있으며 세입의 76%를 거두고 있는 곳이다.(중앙정부의 세입을 포함하면 세입은 61.47 %이다.) 그러나 텔랑가나 출신들 중 정부 고용인은 겨우 20%이고 이중 고위직은 5% 미만이다. 이 지역에서 나는 석탄으로 운영되는 화력 발전소는 남인도 대부분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으나 정작 이 지역의 전기 보급률은 낮다. 정부가 지원하는 초등학교 교육으로 잡힌 예산은 10% 정도만 할당된다. 주에 흐르는 크리쉬나 강 저수량은 68.5%이고 고다바리 강 저수량의 69%가 텔랑가나 지역에 있다. 관개시설을 통한 물의 공급은 텔랑가나는 겨우 18.20%에 불과하며 코스탈 안드라 지역에 74.25%, 라얄라시마 지역에 7.55%를 공급하고 있어 농업이 주요 산업인 인도에서는 불평등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쌓이기에 충분하다. 텔랑가나 분리 운동의 지지자들은 텔랑가나 지역에 대해서 합의. 입법, 계획 등은 인도 정가에서 지켜지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별도의 주로서 독립되어서 텔랑가나 지역 출신으로 주정부를 새로 구성하지 않고서는 저수량 통제, 교육, 취업 등의 불평등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텔랑가나 분리 운동의 주된 이유였다.


 문화적인 부분도 무시 못 할 것은 이들은 스스로를 데칸지역의 사람들이라고 데카니(decani)라 부른다.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 판다바의 측에 서서 싸운 텔리가나 왕국을 그 기원으로 보는 주장도 있고 11세기 안드라 프라데시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던 텔레구 왕국으로 거슬러가는 설도 있지만 이 것은 텔레구 지역 현재 주민들의 정체성과는 별 관계 없는 지리적 위치에만 근거한 주장들인 것 같다. 현재의 지역 주민들의 정체성으로 추적을 하면 16세기에 무하마드 퀼 쿠틉 샤(Muhammad Quli Qutb Shah) 술탄이 하이데라바드 시를 건설한 것을 기원으로 보아야 한다. 80% 가량이 힌두 신자이기는 하지만 예전 지배 계급의 종교였던 무슬림의 영향은 텔랑가나 지역 곳곳에 유적으로 남아 있으며 우르두어로 씌여진 훌륭한 문학작품들도 내려오고 있다. 불평등한 이용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대규모 관개시설도 인도 독립 직전의 무슬림왕조였던 니잠 왕조때부터 건설된 것이다. 또 안드라 프라데시의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텔랑가나 지역은 영국 지배를 직접 받지 않고 니잠 군주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니잠 왕조의 억압에 맞서서 토지개혁을 요구하면서 대규모 무장 봉기를 1946년에 일으키었고 니잠 왕조가 독립 인도의 마드라스주로 통합된 이후인 1951년에도 다시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웨스트 벵갈에서 낙살라이트 봉기 지도자였던 차루 마줌다르는 인도 낙살라이트의 역사적 기원을 이 텔랑가나 농민 무장봉기로 거슬러 올라갔었다. 텔랑가나 농민 봉기의 지도자이자 인도 공산당의 창립 멤버인 라비 나라얀 레디(Raavi Narayana Reddy)는 인도 공산당 후보로 나와 총선에서 네루를 재치고 전국 최다 득표를 획득해서 이 농민봉기가 얼마나 대중적이었는가를 증명했다. 비옥한 땅,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자원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이 받는 억압과 차별의 역사는 데칸고원의 산악지대를 낙살라이트의 활동구역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텔랑가나 지역 주민들은 역사적으로 억압을 받고 살아왔다는 자각을 공유하는 뚜렷한 지역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1956년 마드라스에서 안드라 프라데시가 분리될 때 안드라 프라데시에 속하게 된 텔랑가나 지역 문제는 출발부터 잡음이 많았다. 향후 텔랑가나 지역이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한다는 것을 전제로 텔랑가나를 안드라 프라데시에 합병했지만 네루는 “제국주의 확장주의의 희미한 색깔” 이 보이며 이 합병을 “이혼을 조건으로 올리는 결혼” 같다고 비유하면서 우려했다. 네루의 사위이자 인드라 간디의 남편인 국민회의 정치인이었던 페로제 간디(Feroze Gandhi)는 텔랑가나 지역 주민들의 요구사항들을 들어주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합병 이후 불평등은 점점 커져갔고 이로 인한 분리운동은 점점 더 고조되어 왔다. 1969년에는 하이데라바드 대학 학생들 중심으로 일어난 분리운동은 수백명의 사상자가 있었고 이중 369명은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국민회의는 언어외에 다른 이유로 주 분리를 주장하는 것은 반국가적이라고 규정하고 탄압을 가해왔다. 인드라 간디는 분리를 반대하면서 타협안으로 텔랑가나 출신의 P. V. 나로시마 라오(P. V. Narasimha Rao)를 주수상으로 등용했으나 텔랑가나 지역에서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2000년이 되면서 분리주의 운동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BJP가 자신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 텔랑가나 지역을 분리시켜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BJP는 자르칸드, 차티스가르, 우타르칸드를 분리시켜 새로운 주로 만들었다. 텔랑가나 지역의 독립이라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 있다는 지역 정당TRS(Telangana Rashtra Samithi)도 힘을 얻어갔다. 이 때문인지 지금까지 분리에 부정적이었던 국민회의 내의 텔랑가나 출신 국회위원들도 의석을 잃을까 두려워서인지 분리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2004년 TRS와 국민회의는 텔랑가나 주 분리를 공약으로 텔랑가나 지역에서 연합하여 선거에 승리를 한다. 그러나 약속 이행이 늦어지자 TRS는 국민회의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2009년 TRS의 의장인 K 찬드라쉐까르 라오(K. Chandrashekar Rao. KCR)의 목숨을 건 단식과 학생, 노조 등 다양한 대중조직의 시위와 12월 6, 7일 총파업등이 있었다. KCR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고 그가 사망한다면 시작될 저항이 두려워서인지 중앙정부는 2009년 12월 9일 텔랑가나 분리를 안드라프라데시 주 의회에서 결의안을 낼 것이라고 공식적인 발표를 했다. 그러나 텔랑가나 분리가 계속 미루어지면서 해마다 몇 백명의 사람들이 항의를 위해 자살을 했었다. 2013년 7월 31일의 발표가 이전과의 차이가 있다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국민회의 내 현재의 안드라 프라데시가 유지되는데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들의 방해- 예를 들면 소수의 무슬림들은 텔랑가나 분리를 원하지 않으니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명분 내걸기- 도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분위기에 도달한 것이다.  수 천 명의 죽음으로써 분리된 텔랑가나 지역에도 이제 개발이 본격화될 것이다. 아울러 불평등 문제로 지속되고 있는 데칸고원의 낙살라이트 운동도 이를 계기로 어느 정도 수그러들 가능성도 있다.

 중앙정부를 이끌고 있는 국민회의는 텔랑가나 주의 분리가 다른 주의 분리운동과 비교되어서는 안되며 다른 주의 분리운동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각 지역 정치 운동자들 또한 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웨스트 벵갈의 마마타 바너지 주수상은 8월 1일 단호하게 고르칸드 지역을 웨스트 벵갈에서 분리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고르칸드는 웨스트 벵갈의 언어인 벵갈어를 사용하지 않고 네팔리를 쓰며 힌두가 주류인 웨스트 벵갈에서 티베탄 불교, 기독교 등을 믿으며 인종 상으로 동아시아 계열이다. 고르칸드는 언어가 다른 만큼 주 분리의 이유가 선명하다. 그러나 고르칸드주가 분리되면 웨스트 벵갈은 차 생산으로 경제적 이윤이 높은 다즐링 지역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웨스트 벵갈의 벵갈리들은 이를 원하지 않는다. 한편 UP의 카스트 기반의 BSP를 이끌고 있는 마야와띠는 텔랑가나의 분리를 환영하면서 UP를 4군데로 뿌르반찰(Purvanchal), 분델칸드(Bundelkhand), 아와드 프라데시(Awadh Pradesh) 파스침 프라데시(Paschim Pradesh)로 분리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주수상으로 있던 2011년 이 안을 제출한 바 있지만 이를 반대정당들의 반대로 이룰 수는 없었다. 이제 다가오는 선거 전에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표면 상의 이유로는 “작은 주들이 관리하기 좋아서 성장이 빨라진다”를 들고 있지만 정치적 이유가 그 말 속에는 숨어 있다. 마야와띠는 불가촉천민 출신 최초의 주수상이라는 명예를 안고 있지만 부패 등의 문제가 드러나면서 선거 결과가 매번 기복이 너무 심했다. 그러나 인도 최대의 유권자들을 보유한 UP가 4군데의 주로 갈라지면 그녀가 강세를 보이는 선거구들이 모인 주에서 그녀는 지속적으로 주수상을 할 수 있기 때문으로 예측이 된다. 이렇게 주 분리의 명분과 그에 얽힌 이해관계는 주마다 각기 다르기 때문에 일관된 잣대를 가지고 주 분리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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