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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Fevicol보다 더 끈끈한 인도와 일본의 관계

인도 고홍근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 교수 2014/09/30

모디 수상이 지난 8월 28일부터 9월 3일까지 5일 동안 일본을 방문했다. 수상 취임이후 첫 번째의 역외(域外)국가 방문이었고, 방일 기간 중이었던 9월 2일은 수상취임 100일을 맞는 날이었다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방문의 성과도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앞으로 5년 동안 350억 불의 투자와 원조 약속이 최대의 성과였고 환경개선, 기간산업 건설, 보건과 여성문제에 있어서도 양국의 협력관계를 더욱 향상시키기로 하였다. 한편 일본으로서도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이 지적한 것처럼 앞으로 10년간 일본 제조업체에게 매력적인 시장이 될 인도시장으로의 진출이 확대되었으며, 인도철도 현대화사업에 신칸센(新幹線)이 참여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우리 언론에서는 모디의 방일 성과가 중국을 견제하려는 인도와 일본의 의도가 일치한 결과라는 매우 정치공학적인 분석을 내놓는 경우가 많지만 두 국가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모디는 지난 9월 2일 재일인도인협회의 초청만찬에서 인도와 일본과의 관계는 ‘페비콜(인도산 순간 접착제)보다 더 결착력이 있다.(Yeh fevicol se be zyada mazboot jod hai)‘라고 강조했다. 일본과는 역사적 앙금과 실제적인 현안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도 시장에서는 경쟁관계에 있는 우리로서는 양국의 관계증진을 마냥 축복해줄 수만은 없다. 더욱이 일본에서는 4박 5일이나 머물며 한가롭게 다도(茶道)강습까지 받았으면서 바로 옆에 있는 우리나라에는 들리지도 않은 모디에게도 섭섭함을 느낄 수도 있다. 따라서 ‘페비콜’발언을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치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도와 일본 사이에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아니, 애써 무시하고 있는 끈끈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은 아시아인들의 희망’: 인도인의 생각

인도인들이 일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개혁을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 들은 비베카난다(Vivekananda: 19세기 인도철학자, 힌두민족주의의 효시) 등에 의해 일본의 발전상이 전해졌었다. 1905년의 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한 이후부터는 일본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동북아시아 한구석의 작은 섬나라가 유럽의 대국 러시아를 물리쳤다는 것은, 세계의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특히 유럽인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인도인들은 ‘아시아도 유럽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일본인에게서 발견했던 것이다. 20세기의 전반부,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정책은 인도인들에게 의구심과 혐오감을 주었던 것도 부분적으로 사실이지만, 일본의 급속한 공업화와 봉건사회에서 현대사회로의 성공적 전환 등이 일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고조시켰다. 여기서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던 우리로서는 ‘영국의 식민지배로 고통을 받고 있던 인도인들이 설마 제국주의 일본에게 호감을 느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되지만, 인도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영국인들을 인도 땅에서 쫓아내 줄 유일한 아시아 국가는 일본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의 인도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의 창설과 활동도 이와 같은 생각의 연장선에 있었다. 보스에게 ‘영국은 인도의 적’, ‘일본은 영국의 적’이었므로,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에서 일본을 친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비록 보스의 인도국민군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인도 최초의 독립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일본은 그 ‘독립군’을 도운 후원자로 인식되고 있다.

천축(天竺)의 꿈: 일본인의 인도

인도인들이 일본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세기가 가까워져서이지만 일본인들은 불교가 전해진 기원후 8세기 이래로 인도를 ‘천축’ 또는 ‘서방정토(西方淨土)’로, 부분적으로는 전설과 신화의 나라로 동경해 왔었다. 일본인들에게 인도가 정치적 실체로 다가온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출병의 최종목적지는 인도였다. 즉, 한반도를 통해 중국을 점령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인도까지 정복한 후 중국의 닝파(寧波)에 막부(幕府)를 설치하고 아시아를 통치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우리에게는 도요토미의 ‘열등 콤프렉스’또는 ‘과대망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1591년 고아(Goa)의 포르투갈 총독에게 편지를 보내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정복하겠다.’는 일종의 공갈외교까지 펼친 것을 보면 나름대로는 꽤 진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이 다시 인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메이지(明治)시대였다. 1899년 동경제국대학교에 싼스끄릿어과가 생겼고, 1903년 일본-인도협회가 창설되었다. 1910년대 인도의 독립운동이 격렬해지자 영국정부의 추적을 받던 일부 독립운동가들, 즉 라쉬 베하리 보스(Rash Behari Bose), 나이르(A.M. Nair) 등이 일본으로 피신한다. 이 사람들이 현대 인도-일본 관계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었고, 특히 보스는 현재에도 일본인들이 무척 애호하는 ‘인도식 카레라이스’를 유행시킨 인물로 유명하다.

2차 대전 중에는 군사적 목표이기도 했던 인도가 일본의 대중들에게 더욱 뚜렷하게 각인된 것은 종전 후 열린 동경전범재판 때였다. 연합국 재판관이었던 인도인 판사 팔(Radhabinod Pal)은 11명의 재판관 중 유일하게 피고인 전원의 무죄를 주장하는 소수의견을 제출했다. 팔은 ‘전쟁의 승패는 힘의 강약(强弱)에 의한 것이지 정의와는 관계없다.’는 전제(前提) 아래서 ‘침략전쟁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일은 부당하다.’는 등 모두 1,257페이지에 달하는 판결이유서를 제출했다. 팔의 의견은 판결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1952년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의 ‘일본무죄론(日本無罪論)’의 논리적 근거가 되어 현재에도 일본 우익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66년 팔은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일등 서보장(勲一等瑞宝章: 1급 국가훈장)을 받았고, 지난 9월 모디를 만난 아베(安倍)는 ‘모든 일본인들이 팔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며 팔을 인도-일본 친선의 상징으로 자리 매기기도 했다.

1949년 네루(Jawharlal Nehru)는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일본의 어린이들에게 ‘인도 어린이들의 친선의 선물로서 자기 외동딸의 이름과 같은‘인디라(Indira)’라는 코끼리를 도쿄의 우에노 동물원에 보내주었다. 이 코끼리는 당시 일본사회에 큰 화제가 되었었고, 1983년 고령(高齡)으로 죽을 때까지 많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인도와 일본이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것은 1952년이었지만, 냉전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이 두 국가의 관계발전을 방해했었다. 비동맹을 표방하는 인도와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 사이에 간극(間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냉전이 종식된 1980년대 중반부터 인도의 ‘동방정책(Look East)’은 일본을 중요한 파트너로 지목했고, 일본도 이에 부응하여 경제원조를 재개했고 지금도 일본은 인도의 최대 원조제공국이다.

‘메라 주따 헤 자빠니’

1955년 나온 영화의 주제가 ‘메라 주따 헤 자빠니(Mera Joota Hai Japani: 내 신발은 일본제)’는 인도 영화 역사상 가장 유행한 노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노래 글의 핵심은 ‘겉모습은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더라도 마음만은 인도인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일종의 애국심 고취의 노래였다. 하지만 1955년이라면 일본이 한국전쟁 덕분에 겨우 경제부흥의 문턱에 들어섰을 뿐이었는데 영국, 러시아 등의 그 당시 선진국들과 함께 노래 글에 등장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비베카난다 이래 인도인들은 ‘일본은 모든 것을 유럽으로부터 받아들였지만 일본 그 자체의 것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소위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아이콘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모디는 비베카난다의 열렬한 추종자이며 10대 후반이래 힌두민족주의 단체인 RSS(민족의용군)의 단원으로 활동해 왔었다. 따라서 모디도, 대부분의 인도인들처럼, 일본의 잔학성이나 공격성에 대한 비판보다는 일본인들이 가진 불굴의 정신과 집단적 충성심에 대한 감동에 더 경도(傾度)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특히 모디는 개인적으로도 일본에 대해 각별한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2012년 친미국가들 중에서는 일본이 유일하게 모디의 방문을 허가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디가 주지사 시절 중점적으로 추진했었던 ‘활력의 구자라트(Vibrant Gujarat)’ 투자설명회에 해마다 주인 일본대사 참석하였고, 2013년에는 100명이 넘는 일본기업인들이 참석하여 실질적인 투자계약을 성립시켰기 때문이다. 모디는 일본을 자신의 종교적・이념적 배경과 관계없이 오로지 행정가로서 또 정치가로서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유일한 외국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국가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변수에는 경제적, 이념적, 공동의 적의 존재, 종교적 등 다양한 국면들이 존재한다. 단기적인 국제관계에서는 이 국면들 중의 하나 또는 복수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이 국가들의 국민이 서로에게 어떤 호오(好惡)의 감정을 갖는가에 따라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본다면, 아마 모디가 인도를 이끌어가는 한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시켜나갈 것이고 일반적인 국민정서상 그에 대한 반대여론이 나타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남 잘되는 것은 절대로 못본다.’는 못된 성격 탓은 아니지만, 인도와 일본의 관계강화를 단순히 축하의 심정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인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 제품이 일본을 앞서 선점한 시장이고, 우리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가 일본을 누르고 있는 몇 안되는 곳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 제품이 가지고 있는 ‘값어치가 있다.(Value for money)’라는 인도인의 인식이 수상이 일본 한번 갔다 왔다고 해서 당장 뒤집혀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지만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고속철과 핵발전소 건설 등 장기적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프로젝트들에서 일본에게 뒤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다시 말해, 일본의 신칸센(新幹線)을 모방한 고속철도가 인도 전역에 건설될 때도 우리는 자동차나 냉장고를 파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100년 친선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을 제외하고도 인도가 최대적국으로 간주하는 중국마저도 200억불의 투자를 약속하며 인도시장을 파고들려고 하는 지금, 우리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고, 우리의 위치는 더욱 외로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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