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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안다만 니코바르 열도, 일본 그리고 종군위안부

인도 고홍근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 교수 2014/03/28

안다만 니코바르 열도(Andaman Nicobar Islands)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1987년 김현희의 KAL기 폭파사건으로 ‘안다만 해(海)’이라는 이름이 언론에 등장하기는 했었지만 그 이후 이 섬들은 우리의 관심에서 곧 멀어졌다. 따라서 ‘느닷없이 안다만?’ 또는 ‘인도 경제를 주로 다루는 이 사이트에 무슨 종군위안부?’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도의 한 부분인 이 열도의 현대사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특히 최근 한국과 일본 사이에 최대 현안이 되고 있는 종군위안부들의 슬픈 역사에 대한 또 다른 단초(端初)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을 쓴다. 

 최근 일본 정부는 1993년의 ‘고노 담화(河野談話)’를 검증하겠다고 나섰다. 고노담화의 내용은 위안부와 위안소가 장기간 그리고 광범위하게 존재했으며 그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舊) 일본군이 관여하였고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 하에서 참혹한 것이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또한, 전장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조선반도는 일본의 통치 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甘言),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하여졌다.’라며 한국인 위안부들의 강제동원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검증의 목적이 위안부들의 참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한 것이라면 일본의 반성과 양심을 칭찬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월 12일 일본 아베(安倍晋三) 수상은 의회 답변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틀린 사실을 늘어놓고 일본을 비방·중상하는데 대해서는, 사실에 근거해 냉정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 일본 유신회 소속의 나카야마(中山成彬) 중의원 의원은 3월 8일 한 강연회에서 위안부 중에는 일본 여성도 있었다면서 ‘한국여성은 거짓말만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일본여성은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데 한국여성은 그러지 않는다. 인종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인종론까지 끌어들였다. 이 사람은 전에도 중의원에서 ‘일본의 관헌(官憲)이 강제로 조선의 여성을 연행해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위안부는 없었다.’고 강변하기도 했었던 전력이 있는, 논리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이다. 현재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은 나름대로의 정치적 입지도 있을 터이고 쇠락해가는 일본의 국력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처지라고 해도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계속 우겨서는 안된다. 물론 아베 수상 등의 일본 정치인들은 ‘위안부는 강제동원된 것이 아니라 자진한 것이었다.’는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다만과 그곳에까지 위안부가 갔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안다만 니코바르 열도(이하 안다만)는 한 마디로 절해고도라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섬이다. 모두 572개의 섬들로 구성된 이 열도는 1,190km 떨어진 인도 본토의 첸나이로부터 여객기로 2시간 15분, 여객선으로는 2박 3일이 걸린다. 안다만이 인도 본토와 역사적으로 관계가 있게 된 것은 11세기 초 남부의 촐라(Chola)왕조가 현재의 수마트라 섬에서 융성했던 해양 국가 스리위자야 제국(Sriwijaya Empire)을 견제하기 위해 이곳을 탐험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였다. 탐험의 결과, 촐라왕조의 사람들은 안다만을 따밀어로 ‘띤메띠부(Tinmaittivu)’ 즉, ‘더러운 섬’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이후 역사에서 사라졌던 안다만은 1756년 덴마크의 식민지가 되면서 다시 그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덴마크 인들은 말라리아 등의 전염병 때문에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었고, 1858년에는 영국이 안다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지리적으로는 미얀마나 태국, 인도네시아와 훨씬 가까운 이 섬들이 현재 인도 영토가 된 것은 순전히 영국 제국주의의 덕분이었다. 당시 영국은 미얀마(버마) 침공을 위한 안다만을 전진기지로 사용하였다. 군사전략적 목표에 의해 점령했던 이 섬들을 1857년 영령인도제국의 성립과 함께 영국은 다른 용도로 개발하기 시작한다. 즉, 저 악명 높은 쎌루라 감옥(Cellular Jail)을 건설하여 처음에는 세포이 반란(Sepoy Mutiny)에 참여했던 사람들, 후에는 인도의 독립운동가들의 감옥으로 사용했다. 이 셀루라 감옥은 지금도 안다만의 대표적인 건축물이고, 이 섬들이 근대에 들어 ‘유형(流刑)의 섬’ 또는 ‘인도의 시베리아 감옥’으로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안다만도 역사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1942년 3월 일본 해군과 육군의 특공대 600명이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잇는 영국의 보급선을 끊을 목적으로 안다만을 기습 점령한 것이다. 영국군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항복했고,  쎌루라 감옥의 소장을 비롯한 23명의 영국군은 포로가 되었으며 약 300명의 시크교도 병사들은 일본이 조종하는 인도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에 편입되었다. 일본은 안다만 점령의 정당화 그리고 앞으로 있을 인도 본토 침공에서 인도인들의 반영투쟁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1943년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ath Chandra Bose)의 ‘자유인도 임시정부(Arji Hukoomat-e-Aajad Hind)’에 안다만을 할양한다. 안다만은, 형식상으로는, 영령인도제국 영토 내에서 최초로 독립인도의 정부가 들어선 곳이 되었다.
 
그 당시 안다만의 주민들도 일본의 지배에 대해서 큰 반발을 하지 않았다. 사실상, 대부분의 안다만 주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식민지배자가 영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을 뿐이었으므로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한, 크게 개의할 사건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행장 건설 등의 강제 노역 동원으로 주민들 사이에 불만이 커지는 중에 위안부 문제가 발생한다. 점령 초기에 일본군은 현지 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 동원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것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1942년 중반 한국인 위안부 3명이 포함된 위안소가 안다만에 설치되게 되자 일본군에 협조적이었던 주민들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위안부의 존재가 안다만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에서 였다. 일본군은 이 반발에 강경진압으로 맞섰다. 같은 해 10월 약 300명의 사람들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 중 당시 경찰서장이었던 나라얀 라오(Narayan Rao)를 포함한 7명이 총살되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어떤 움직임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또 위안부의 존재가 협조적인 현지 주민들보다 훨씬 중요했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하는 행동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일본군의 만행은 더욱 그 정도를 더 해갔다. 특히 싱가폴이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 보급상황이 나빠지자 일본군들은 걸핏하면 주민들을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여 섬 전체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불과 3년 간의 통치 중에 일본군이 처형한 인도인의 수는 2,000명에 달했다. 당시 안다만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밀집해 있던 포트 블레어(Port Blair)의 인구가 20,000명이었음을 감안하다면 일본군은 학살에 가까운 행동을 한 것이었다.

 안다만은 사진이나 영화를 통해 보면 아름다운 곳이다. 야자수가 늘어 서있는 하얀 모래의 해변도 있고 열대우림의 웅장한 모습도 볼 수 있다. 또 220종의 조류와 275종의 나비가 살고 또 다양한 종류의 야생 멧돼지와 박쥐가 있으며 세계적으로 드문 바다 악어도 있어서 생물학적 보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매일 몇 차례씩 비가 오고 눅눅한 소금기를 머금은 세찬 바람이 몰아친다. 아름다운 해변은 있지만 파도가 너무 거칠고 간혹 상어도 출몰하여 바다에 들어가기 어렵다. 짙은 녹색의 원시림이 도로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즐비하게 있지만 그 안에 어떤 독사와 독충이 있는지 몰라서 성큼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1시간만 걸어도 마주치는 것은 바다뿐인 커다란 감옥과 다름없다. 아마 세상의 끝에 와 있는 것과 같은 고립감과 무력감을 느끼기에 안다만보다 좋은 장소는 없을 것이다.
  
 1945년 안다만에서 철수할 당시 일본군은 자신들의 기록을 철저히 파괴하고 떠났다. 따라서  그곳에 존재했던 종군위안소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단지 현지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몇 권의 다큐멘터리에 한국인 위안부의 존재가 일본군과 안다만 주민 사이의 갈등의 원인으로서 스치듯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미 일본인들은 오래 전에 안다만에서 사망한 일본군을 기리는 ‘전몰자 위령비’를 만들었다. 이 글을 쓰는 이 시각에도 그 위령비 앞에서 일본인들은 군인이라는 이유로 ‘인도의 시베리아’에서 목숨을 잃은 선조들의 불운함을 애통해하며 눈시울을 적실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위안’을 위해 저 ‘유형의 섬’까지 가야만 했었던 그리고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은 위안부들을 기억하는 일본인들은 얼마나 될까? 아니, 기억하여 슬퍼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어떤 일본정치인의 주장처럼 ‘영업’을 목적으로 자진해서 세상의 끝까지 갔다는 모욕적인 발언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안다만은 교통편과 생활환경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재에도 놀러가기에도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고노 담화가 인정한대로 ‘감언과 강압’이 없었다면 촐라왕조의 사람들이 ‘더러운 섬’이라고 부른 그곳까지 자진해서 갔을 위안부는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할 즈음에 아베 수상이 고노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발표하여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 걸음 물러서는 태도를 보였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아마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미봉책에 불과할 것이다. ‘칼로 생긴 상처는 아물 수 있지만, 말로 생긴 상처는 아물기 어렵다.’ 라는 몽고의 속담이 있다. 과거 일본이 저질렀던 많은 잘못 때문에 아물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많고 왜곡된 역사를 갖게 된 나라들도 있다. 이번 아베 수상의 발언을 계기로 일본은 피해자의 상처를 헤집어 놓는 망언과 행동을 중단하고 진정한 반성과 치유의 길로 들어서기를 기대해 본다. 어쩌면 2차 대전 중 일본의 침공지 중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한 안다만에 위안부들의 희생을 반성하고 사과하는 비석 하나라도 자진하여 세우는 것이 그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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