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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2011년 홍수 사태를 전후한 태국의 정치동향

태국 윤진표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12/02/27

태국은 2011년 7월말부터 넉 달 넘게 70년만의 대홍수를 겪었다. 중‧북부 지역에 집중된 홍수로 불어난 강물로 인해 방콕의 제방이 범람했고, 주변 7개 공단이 완전히 침수되었다. 홍수로 인해 전국에서 813명이 사망했고, 재산피해는 52조원에 달했다. 태국은 대홍수 여파로 4분기 경제성장률이 -9%를 기록했고, 결국 2011년 전체 경제성장률도 0.1%에 그치고 말았다. 태국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던 2009년에는 -2.3%로 떨어졌다가 2010년에는 7.8%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내우외환으로 인해 요동을 치고 있다.
 

매년 겪는 자연재해였지만 작년의 홍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문제는 재해의 물리적인 규모가 컸다기보다는 많은 국민들이 정치적 요인에 의한 인재까지 겹치면서 홍수의 피해가 더욱 커졌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방콕 주변의 주민들은 범람한 강물을 지켜보면서 방콕 중심부를 지키기 위해 물길을 막거나 돌리면서 방콕 주변의 자신들이 희생양이 되었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방콕 도심 외곽지역의 침수로 이 지역주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드러냈다. 방콕 북부 지역에서는 주민 수백 명이 주요 교차로를 점거하고 이 일대 운하의 수문을 더 열라고 요구해 정부가 이를 일부 수용하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정부가 물길을 제어하기 위해 쌓아놓은 제방을 주민들이 파괴하는 일도 발생했다.  
 

2011년 8월 출범한 잉락 정부의 홍수대책은 야당인 민주당이 잡고 있는 방콕시청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게다가 관련 부처의 부적절한 늦장 대응과 부처 간 책임 전가는 홍수 피해를 당한 주민들을 더욱 화나게 했다. 상대적으로 빈곤한 방콕 외곽지역 주민들의 정치권에 대한 불만은 필자가 11월 직접 방콕 지역을 둘러보면서 여러 곳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과거와 달리 재해를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관계에서 자신들이 희생되었다는 계층 갈등적인 불만의 목소리를 터트리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 현상에 대한 우려는 필자가 만나본 지식인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2011년 대홍수를 통해 드러난 태국 국민들의 분노는 지난 수 년 동안 지속된 정치적 혼동의 당연한 결과로 보였다.     

 

태국은 1992년 이후 2005년까지 선거 결과에 순응하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민주주의 공고화를 향한 정치엘리트와 국민들의 정치적 학습이 그런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2006년 9월 발생한 군부쿠데타와 그 후의 혼란스러운 사태는 선거 결과를 폭력으로 뒤집고, 선거 결과에 순응하지도 않고, 정치가헌정체제 밖으로 이탈하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왔다. 2006년 이후 태국정치는 제도와 리더십의 부조화로 야기된 갈등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헌법으로 불린 1997년 헌법은 민주적이면서도 강한 정부를 지향했는데, 현실은 2001년 탁신 총리라는 독특한 리더십을 등장시켰고, 거대여당을 견제할 만한 야당세력은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탁신을 제거하기 위한 2006년 쿠데타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퇴보를 가져온 2007년 헌법을 만들었고, 이는 국가제도의 핵심인 헌법이 특정 정치세력에 의해 무기력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헌법기관 간의 눈치 보기와 기관 이기주의는 더욱 커졌다. 1997년 헌법에 의해 많은 권한을 갖게 된 국가기관들이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기능을 성실히 수행하기보다 권력자의 눈치를 보면서 좌충우돌하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했다. 특히 공정선거를 책임지는 선거관리위원회와 선거와 정당에 대한 해산권을 갖는 헌법재판소의 무원칙적 태도는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태국 시민사회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도 많은 문제를 보여주었다. 특히 언론과 시민단체의 이중적 태도는 심각한 수준이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언론은 1997년 헌법제정 시 정치개혁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지만 2006년 탁신 퇴진운동에는 헌정주의를 무시한 가두시위를 찬성하고 앞장섰다. 일부 언론은 군부 쿠데타에 동조하면서 선거로 선출된 정권이 쿠데타로 축출되는 것이 태국에서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시민단체는 제도의 정치를 거리의 정치로 만들어 버렸다. 반탁신세력인‘민주주의민중동맹’(PAD, 노란셔츠)과 친탁신세력인 ‘반(反)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 빨간셔츠)이 번갈아 방콕의 거리와 관공서, 공항과 호텔을 점거하며 벌인 거리의 투쟁은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태국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방콕의 중산층과 보수적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PAD와 농민과 도시빈민 및 근로자를 대변하는 UDD는 태국에서 계층 간 갈등이 발생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태국의 리더십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났다. 하나는 탁신 총리라는 경영자형 리더십이고, 다른 하나는 태국의 상징인 푸미폰 국왕의 전통적 리더십이다. 두 리더십은 헌정주의에 따라 작동해야 하는 태국 민주주의에서 각기 독특한 위치에서 제도와 불협화음을 낳았다. 탁신은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통성 있는 리더십이기는 했지만 그의 정책과 개성은 권위주의적이었다. 국민들은 탁신의 활력 있는 리더십을 원했던 것이지 헌법기관을 무시한 밀어붙이기 식의 리더십을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재산처분 과정의 뻔뻔함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치명적인 리더십의 결함이었다. 푸미폰 국왕의 리더십은 지금까지 태국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요인이었다. 그렇지만 84세 국왕의 정치적 역할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너무 강했다가 이제는 쇠약해져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워진 푸미폰 국왕의 리더십과 2001년 이후 지나치게 영악해진 탁신의 리더십이 충돌하면서 정치리더십의 불안정이 나타나고 있다. 푸미폰 국왕의 건강문제가 악화되고 후계문제가 본격화되면 왕실과 군부 등 보수세력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움직일 것이고, 쿠데타로 축출되었다가 2011년 총선으로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탁신이 집권당을 이용해 자신의 귀국 및 사면과 관련해 활동을 재개할 것이기 때문에 2012년 태국은 중요한 변화의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2011년 7월 3일 총선 결과 여당이던 민주당은 지역구 115석과 비례대표 44석으로 총 159석을 차지하는데 그치고, 탁신의 막내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이끈 프어타이당이 지역구 204석과 비례대표 61석으로 총265석을 차지하여 하원의석 500석의 과반수를 획득하는 승리를 거뒀다. 8월 5일 잉락 총리가 취임하며 정치적 화해를 들고 나왔지만 대홍수에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잉락 정부는 '새로운 태국'(New Thailand)이라는 구호 아래 침수피해 복구와 경제재건을 위해 총 9000억바트(32조6천억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홍수대책과 복구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은 지난 수 년간의 정국 불안요인들을 다시 들썩거리게 할 수 있다. 게다가 집권당인 프어타이당의 실질적 지도자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탁신은 사면을 받지 않고 귀국을 강행할 수도 있다. 제 1야당인 민주당의 아피싯 전 총리는 "올해의 정치 안정 여부는 탁신 전 총리에 대한 정부의 입장에 크게 좌우될 것"이라며 "정부가 탁신 전 총리 사면을 강행하면 정정 불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탁신이 집권할 당시 여당이었던 타이락타이당(TRT)은 2007년 선거법 위반 혐의가 인정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해체됐다. 정당 해체로 탁신 등 111명의 타이락타이당 소속 고위 당원들은 5년 간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타이락타이당의 후신인 현 집권여당 프어타이당은 정치활동이 금지됐던 탁신계의 정치인들이 대거 정계에 복귀하는 5월을 전후해 탁신의 사면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와 동시에 잉락 총리의 정치력도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잉락 총리는 2012년 신년 메시지를 통해 "태국 국민은 사회 분열과 정정 불안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면서 "정부는 국가 화합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이미 태국은 대홍수 이후 방콕의 날씨만큼이나 덥고 습한 정치 대결의 시간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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