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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특집이슈

[신흥지역 체험기 공모전 당선작] 구르는 돌, 남인도의 벵갈루루

인도 유고은 - - 2022/06/09

벵갈루루 북쪽의 아파트 단지에서 딸아이의 피아노 레슨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수영장 옆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와서 말을 건다. 한국인인 것을 확인하고는 반가운 얼굴로 에스파의 넥스트 레벨을 흥얼거렸다. 나도 뭔가 호응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어딘가에서 본 대로 ‘디귿(ㄷ)’자로 팔을 꺾으니, 아이는 꺄르르하고 웃었다. 이어서, BTS의 노래 뿐만 아니라 외국인이 좋아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아이유의 노래까지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3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는 당연히 그들의 노래를 잘 알지 못한다. 로리타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소녀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자기를 케이팝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했다. 로리타는 항상 서너 명의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다녔는데, 다들 생김새가 한 지역의 아이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블랙핑크의 노래를 정확한 발음으로 불렀다. 

그 친구들은 서로 대화를 할 때 영어를 사용했다. 로리타에게 물어봤다. “집에서도 영어를 쓰니?” “아니오. 집에서는 타밀어를 써요.”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앞다투어 말했다. “저는 힌디를 써요.” “우리집은 영어를 쓰긴 해요.” 벵골리(방글라데시어)를 쓴다는 마지막 친구까지, 네 명의 아이들은 각각 다른 말을 집에서 쓰고 있었다. 친한 친구들끼리 집에서 쓰는 언어가 다른 것도 재미있는 일인데, 더욱 신기한 것은 이 곳 벵갈루루의 언어인 칸나다어를 쓰는 친구는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도의 수도 뉴델리는 인도의 북쪽에 있고, 내가 살고 있는 벵갈루루는 남쪽의 카르나타카 주(州)에 있는 도시이다. 카르나타카의 주도(州都)인 만큼, 인구도 천만에 육박한다. 이 곳 사람들은 힌디어를 쓰지 않고, 인종도 북인도와 다르다. 이곳의 언어는 칸나다어로, 빨랫줄에 글자가 걸린 것 같이 생긴 힌디어 문자와 다르게, 동글동글한 모양의 글자로 표기한다. 힌디어와는 어족(語族)이 다르기 때문에, 내가 사는 아파트의 단체 채팅방에는 종종 ‘칸나다어 과외 선생님을 찾습니다.’ 라거나, 반대로 ‘힌디어 과외 선생님을 찾습니다’라는 문의가 올라오곤 한다. 힌디어도 그렇지만 칸나다어는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언어라 한국어로 된 교재도 없고, 마땅히 배울 곳도 없어서, 이곳 생활이 1년이 훌쩍 넘은 나도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기사에게 급히 배운 ‘나마스카라(안녕하세요)’와 ‘수바라뜨리(좋은 밤 되세요)’ 두 마디가 끝이다. 

벵갈루루에 사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자신이 인도, 인도 중에서도 벵갈루루라는 도시에 와서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로리타는 나에게 벵갈루루를 소개하면서 이곳은 인도의 ‘실리콘밸리’라는 다소 어른 같은 표현을 썼다. 벵갈루루에 오기 전,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을 때, 벵갈루루에는 다양한 글로벌 기업들이 진출해 있고, 스타트업 기업을 시작하기에 좋은 도시라는 소개 자료를 본 기억이 났다. 한국의 다양한 기업들도 이 곳에 진출해 있다. 인도의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각지에서 벵갈루루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다. 실제로 벵갈루루의 인구 절반 가량은 타지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도, 로리타도, 로리타의 친구들도 모두 벵갈루루에서는 이방인들이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벵갈루루로 넘어온 타지 사람들은 인도의 여느 도시들과는 다소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인도 신화에서 중요한 크리슈나라는 신은 하얀 암소를 타고 다니는데, 인도 사람들은 소를 신성하게 여겨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종교적 이유로 채식을 선호하는 나라 특성상 소 뿐만 아니라 돼지도 잘 먹지 않는다.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야하는 전형적인 한국인으로서 인도에서 살아가는 데 애로사항 중 하나가 슈퍼에서 소, 돼지 고기를 살 수 없다는 것인데, 벵갈루루에는 괜찮은 스테이크집이 많아 아쉽지 않게 소고기를 즐길 수 있다. 고기가 있다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알코올일 텐데, 벵갈루루에는 최근 몇 십년간 미니 양조장 사업이 붐을 이루고 있다. 보통 식당을 함께 겸하고 있는데, 입장하는 순간부터 커다란 맥주 발효통이 당신이 마시게 될 맥주가 바로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알려준다. 인도의 대표적인 와인 브랜드인 ‘술라(SULA)’도 벵갈루루를 거점으로 영업을 하고 있으니, 먹거리에 있어서는 인도의 다른 지역보다는 훨씬 지낼 만한 도시가 또 벵갈루루라고 할 수 있겠다.

한창 성장하고 있는 벵갈루루는 어디에서나 공사가 진행되고 있고, 지하철 연장도 진행중에 있다. 성장하는 도시들이 겪는 모든 문제들을 벵갈루루도 겪고 있다. 요새는 쓰레기 분리수거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데, 언제쯤 정착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고무적인 일이다. 

그 사이 집에서 힌디어를 쓴다고 했던 델리 출신의, 로리타의 친구 가으리는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푸네로 이사를 갔다. 가으리는 벵갈루루가 그립다며 가끔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그리고 머지 않아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자리들은 다른 이방인들이 또 채워 나갈 것이고, 벵갈루루는 그렇게 또 굴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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